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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은 토끼 
‘제로’가 사는 법 


🐰이 토끼, 어쩐지 퇴근 후 내 모습…? 귀는 맥없이 늘어지고, 다리엔 붕대를 칭칭. 반쯤 감은 눈으로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맥주를 병나발 불기도 합니다. 작가 아루타 수프의 작업에 등장하는 토끼의 이름은 ‘제로’. 이 ‘병약미' 넘치는 토끼에게 마음이 훅 끌린다면, 아마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 아닐까요? 제로는 어떻게 태어났을까요?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연 아루타 수프 작가에게 궁금한 걸 몽땅 물었습니다.  


 

🔎인터뷰 미리 보기
▪️붕대 감은 토끼 ‘제로’의 정체는?
▪️작가가 포착한 신주쿠의 잠 못드는 밤 
▪️그림에 담긴 스트리트 감성, 블랙 유머의 뿌리는? 
▪️작가에게 ‘선(Line)’이란? 
▪️제로에게 지금 건네고 싶은 한마디는요?

 

아루타 수프 @arutasoup
블랙 코미디와 스트리트 감성을 바탕으로 
상처 입은 토끼 ‘제로’를 통해 오늘날의 불안과 생존을 그려요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이에요. 한국 관객을 정식으로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소감이 어때요? 

나라마다 작품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긴장과 기대가 공존하고 있어요. 관객 여러분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 가면 좋겠어요. 

 

‘Angel’, 2024

 

작가님 그림에 등장하는 토끼 ‘제로’는 어딘가 망가져 있어요. 쫑긋 솟아 있어야 할 귀는 축 처져있고, 다리는 붕대를 감고 있는 등 전형적인 토끼의 모습은 아니죠. 그럼에도 끊임없이 삶을 이어가요. 어딘가 아파 보이지만, 묵묵히 살아가는 존재. 그런 제로를 보며 위로받았어요. 

아티스트라는 직업은 꽤 터프한 일이에요. 2017년쯤, 저 자신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시기가 있었어요. 아무리 강한 잡음이 몰아쳐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줄, 제 영혼의 기준점이 되어줄 존재가 필요했어요. 그렇게 태어난 게 제로죠. 가끔 제 작품으로 위로나 치유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큰 보람을 느껴요. 제로를 계속 그려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삼월 토끼’

 

제로의 모티프가 된 게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삼월 토끼 March Hare’라고요. 

제로는 삼월 토끼의 현대판이에요. ‘매드 티 파티 Mad Tea Party’에 등장하는 삼월 토끼는 차 모임을 주최하는 세 캐릭터 중 하나인데, 이들은 하트 여왕의 벌을 받아 끝없이 차 모임을 반복해야 해요. 제정신이 아닌 운명을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있죠. 그래서 활기찬 느낌보단, 어딘가 나른하고 힘 빠진 제로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My day with My Dogs’, 2025

 

요즘 ‘제로’는 어떻게 지내는 것 같아요? 

제작자인 제 의도를 넘어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아요. 도시를 산책하거나, 꽃밭에서 강아지나 고양이와 놀기도 하면서요.  


이번 전시 <INSOMNIAC CITY>는 어떤 도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제 스튜디오가 있는 도쿄 신주쿠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특히 신주쿠의 가부키초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주의 깊게 바라봤어요.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인공적으로 꾸며진 세계. 밤의 공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 그 풍경을 허무하면서도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샘플링해 표현해 봤어요. 

 

‘What U See is What U Get’, 2024


전시작 중 유독 마음이 가거나 한국 관객이 주목해서 보면 좋을 작품을 꼽아 본다면요?  

모든 작품에 애착이 있어서 하나를 고르기는 어렵지만, 전시의 메인 비주얼이 된 ‘Wake Up Call’과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은 제 개성이 잘 드러나서 특히 좋아해요.

 

‘Wake Up Call’, 2024

 

현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나 내면의 상처를 그리면서도, 화면은 경쾌하고 재치 있게 흘러가요. 이런 표현 방식은 어떤 경험에서 비롯된 건지 궁금해요. 

개인적으로 다크한 현대 미술을 정말 좋아해요. 예를 들면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폴 매카시 같은 작가의 작업요. 제 그림에도 가끔 어두운 정서가 깔리긴 하지만, 그 바탕에는 스트리트 아트, 그라피티, 클럽에서 경험한 색채와 분위기가 녹아있죠. 관객을 어두운 세계로 끌어들이기보단, 즐겁고 들뜬 기분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이 커요.

벌써 20년 전쯤이네요. 런던에 살던 시절, 드럼앤베이스(D‘n’B)나 브레이크비트 중심의 베이스 뮤직 크루에서 활동하며 매주 파티 포스터와 전단을 만들곤 했어요. 당시 활동이 제 작업 속에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는 셈이죠. 

 

‘FANTASIA’, 2025


작가님 그림을 보면 선(line)에 대한 애정, 고집 같은 것이 느껴져요. 작가님에게 ‘선’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그림의 구조를 지탱하는 ‘골격’ 같은 존재예요. 뼈대가 없으면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잖아요. 그만큼 제 그림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색 없이 선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 b.frame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순간부터 완성까지, 작업 과정은 어떻게 흘러가요?

회화는 만화나 애니메이션과 다르잖아요. 한 장의 그림으로 앞뒤 장면을 상상하게 만들어야 하죠.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다음엔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게 제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일상의 모든 것에서 영감을 받으려고 하죠. 도시에서 벌어지는 사건, 우연히 마주친 흥미로운 풍경, 시사적인 이슈까지. 모두 제 그림의 인풋이 돼요. 

 

‘Down the rabbit hole’, 2024

 

그렇게 수집한 영감을 바탕으로 드로잉을 시작해요. 그다음엔 데스크톱에서 색을 결정하고, 이어 조색과 채색 단계로 넘어가죠. 특히 조색은 늘 세심하게 신경 써요. 화면이 허전하게 느껴질 땐 덧그림을 넣기도 하고요. 계속 파고들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자’는 결정을 내리는 일이 가장 어려워요. 


그림에 EGO, Tough Day 등 짧은 단어나 메시지가 종종 등장하던데, 작가님에게 의미 있는 문장이 있다면 한 가지 소개해 주세요.   

단어나 문장을 넣는 것만으로도 작품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스케치 단계에서 문장을 적어두더라도, 최종적으로 어색하게 느껴지면 지우거나 수정하기도 하죠. 최근에는 WYSIWYG(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이라는 문장이 마음에 남았어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달라는 의미가 ‘저답다’고 느껴졌거든요. 

 

네온사인으로 구현한 WYSIWYG를 만나볼 수 있는 4층 전시장 

 

회화뿐 아니라 조각, 토이, 벽화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어요. ‘제로’와 함께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장르도 있어요? 

인플레이터블(대형 풍선 조형물) 작업은 꼭 한번 실현해 보고 싶어요. 입체 작품은 볼 때마다 늘 감동하거든요. 또 다른 꿈은 세계 도시 곳곳의 대형 전광판에 제 아트워크를 띄우는 거예요. 마치 도시 전체를 하이잭(hijack) 하듯 장악해 보는 거죠. 언젠가는 꼭 이루고 싶어요. 


서울 골목 어딘가에 ‘제로’를 남긴다면, 어디가 어울릴까요?

서울은 올 때마다 쿨한 도시라고 느껴요. 다만 아직 골목길까지는 깊이 알지 못해요. 골목은 아니지만, 펍지성수(@pubg.seongsu)가 기억에 남아요. 작년에 그라피티 라이터 친구가 가볍게 불러줘서 가봤는데, 스케이터들도 있고 분위기가 참 좋더라고요.

 

@pubg.seongsu



지금 이 순간, ‘제로’에게 한마디 건넨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어요? 

“이곳까지 나를 데려와 줘서 고마워.”

 

 

아루타 수프 <INSOMNIAC CITY>
🏛️ 화이트스톤 갤러리 서울
📍서울 용산구 소월로 70
🗓️ 5. 31~7. 20

 

에디터 최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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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스톤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