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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담는 동그라미
감독 ‘에릭 오(@erickoheart)’의 작품은 무엇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던질 뿐이죠. 같은 얼굴의 무수한 캐릭터가 분주한 장면에는 풍요와 빈곤, 성장과 소멸, 어둠과 밝음이 공존해요. 전시 <O>는 둥그런 글자처럼 비슷한 궤도를 돌고 도는 ‘세상의 순환’을 제시합니다. 이 순간에도 반복되는 우리 삶과 어딘가 닮지 않았나요? 제주시 애월읍 ‘하우스오브레퓨즈(@hofrefuge)’에서 만난 감독이 전시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 알고 가면 재밌는 전시 포인트 5 ❶ 주요작 <오페라> 2021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노미네이트, 2020 대한민국콘텐츠대상 애니메이션 문화체육부 관광상 |

정식 오픈 전인데 벌써 전시장이 북적여요.
긴장되네요. 긴 시간 공들였거든요.
준비하는 과정은 어땠어요? 2022년, <프리즈 서울> 개최를 기념하며 ‘스페이스 K’ 외벽을 물들였던 미디어 파사드와 다른 느낌이었을 듯 해요.
‘스페이스 K’에서는 한 작품만 전시했어요. 그때 선보인 <오리진>을 포함해 <오페라>, <오르빗>까지 3부작으로 이번 전시의 뼈대를 만들었죠. 크고 작은 작품을 덧붙여 총 8점의 설치 애니메이션으로 세계관을 설계했어요. 제주도를 돌며 공간을 발굴하는 과정부터 함께했죠.

공교롭게 작품 제목은 모두 ‘O’로 시작하네요. 주제 <O: AN ERICK OH RETROSPECTIVE>와도 맞닿아 있어요.
인생사처럼 돌고 도는 ‘순환’을 보여주고 싶어요. 개인의 하루 역시 반복되지만, 인류의 전체 모습도 비슷하잖아요.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아이러니의 균형 속에 사는 것 같아요. 아름다움이 있으면 추악함이 있고, 전쟁이 터지는 동시에 한쪽에선 축배를 들어요. 늘 전시장에 와서 잠시 잊었던 문장을 일깨워 보는 거죠.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오페라>는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어요. 국제 무대에서 알려진 작품이지만 국내에선 처음 접하는 관객도 있을 것 같아요.
영화제처럼 제한된 환경에서 공개하는 것과 달리 대중에게 선보이는 경우는 사실 이번이 처음이죠. 그간의 커리어에서도 저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이에요.
전시의 씨앗이 된 작품이네요. 장편으로 더 풀거나 평면에서 상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설치 애니메이션’을 택했어요?
<오페라>는 처음부터 ‘전시’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작품이에요. 영화관에서 정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여러 기법을 체험하는 형태로 옮기고 싶었죠. 화면 레이어를 겹겹이 쌓아서 구성한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전통 기술에서 모티프를 얻었어요. 음악 소리가 압도될 만큼 큰 이유도 옆 사람과 대화할 수 없는 상황을 의도했고요. 이외에도 전시장에서 직접 발견하고 느끼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아! 그래서인지 지하로 내려갈 때 진짜 애니메이션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전시장 입구가 꼭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는 굴 같거든요.
그렇죠! ‘무형의 존재에 영혼을 불어넣는다’라는 ‘애니메이션’의 어원을 따라 모든 공간이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느껴지길 바랍니다.
새 문화 공간, 새 설치 장르, 새 전시. 모든 게 처음이자 ‘0’에서 시작하는 프로젝트잖아요. 잘 해내야 한다는 조바심도 있었을 법해요. 쫓아오듯 수많은 콘텐츠가 빠르게 생산되는 시대니까요.
당연히 부담됐어요. 함께한 모두가 조급했을 거예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니까 유행 타지 않겠다고 봤고 마음을 다잡았죠. 본질인 ‘콘텐츠’에 집중하며 서로 격려했어요. 빠른 완성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생각한 그림을 멋지게 그리는 일 같아요.
2010년에 공개한 <HEART>
서로를 지지하는 마음이야말로 창작 집단이 바라봐야 할 길이 아닌가 싶네요. 움직임을 만드는 ‘애니메이터’이던 때에도 개인 작업을 꾸준히 했어요. 퇴근 후에 무언가 만드는 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오히려 창작했기 때문에 회사 생활을 버텼어요. 누가 보면 아무리 꿈의 직장이라 해도 온전히 ‘나의 것’만 만든다고 말하기 어렵거든요. 아이디어는 계속 떠오르니까 단 1분짜리 영상일지라도 내보내는 게 중요했어요. 대단하지 않을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든 작업을 이어가려면 경계하는 태도도 있을 것 같아요.
누구나 하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 ‘이만하면 됐다’라는 마음이요. 자기 자신을 깨는 불편을 감수하지 않는 이상 발전은 멈추잖아요. 안주하는 태도가 가장 위험해요. 예술이 아니라 그 어떤 분야를 막론하는 말이죠.
창작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원천이 궁금해지네요.
많은 분이 주시하는 질문이겠어요. 어쩔 수 없이 나이를 언급하게 되네요. 예술가로서의 성장과 삶의 속도가 비슷하거든요. 삼십 대 초까지는 확실히 ‘나 자신’이 너무 중요했어요. 내가 누구인지, 주변인과의 관계를 비롯해 결핍, 인정 욕구 등을 토해내는 것처럼 표현하죠. 시간이 흐르면서 시선이 자연스레 바깥으로 향했어요. 타인과 사회, 자연과 우주가 보이다가 여기까지 왔죠.
‘픽사’에서 2010부터 2016년까지 작품 <인사이드 아웃>, <도리를 찾아서> 등에 참여했다
그동안의 커리어를 보면 7년간 근무했던 ‘픽사’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하하. 죄송합니다. 수식어처럼 쓰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는지 궁금했어요.
살다 보니 사라졌어요(웃음). 솔직히 ‘픽사’를 떠난 직후엔 조금 예민했는데 돌이켜 보면 어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걸어온 만큼이 다 내 길이잖아요. 이제는 부정 안 하죠. 그때 체득한 기술을 지금도 활용하고 있고. 아마 픽사 DNA가 흐를지도요? 다만, 어디로 가든 늘 새로운 영역을 찾아 나서고 있다는 확신은 있어요.

지금은 전체 흐름을 지휘하는 입장이에요. 한 편을 완성하려면 다양한 의견을 하나로 좁히는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감독님만의 조율 방법이 있나요?
이렇다 할 비법보다 두 단계가 필요해요. 처음엔 순수 작가가 되어 보는 거죠.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가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하고 싶은지 쌓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고독한 시간을 견디며 숙제를 잘해놓을수록 다음 단계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동료를 모으는 일이 수월하죠.
리더십에 다양한 요소가 있겠지만, ‘명료함’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감독에게 거창하고 특출한 통솔력이 필요한 것 같진 않아요. ‘어디로 가고 싶은가?’ 머릿속에 지도를 아주 명확히 그릴 수 있으면 돼요.

그간의 작품에 담은 사회 이슈나 문제의식도 눈에 띄어요. 누군가 불편감을 느낄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귀여운 캐릭터를 빌려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려고 해요. ‘세상엔 보기 싫은 장면도 있어. 부드럽거나 매끄럽지만은 않아’라며 인정하는 과정이 먼저 필요한 것 같거든요. 그래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할 수도 있죠.

업이든 삶이든 어딘가 기여하는 방향을 계속 찾는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거만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모두 각자의 사명감이 있으면 좋겠어요. 과학자는 실제로 인류의 존속을 위해 연구하죠. 의사는 진짜 사람을 살리고요. 그 맥락에서 제 탤런트가 예술이라면 부와 명예를 독식하는 목표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아, 반성하게 되는데요.
에디터님 글도 그럴걸요? 아닌 것 같아도 누군가 다 읽고 있을 거예요. 어떤 사람은 글 한 편으로 삶을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죠. 선한 에너지는 필요해요. 정말로.
다시 전시 보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겠어요(웃음). 오랜 시간 신중하게 장소를 선정하고 공간을 꾸민 것처럼 앞으로의 계획도 촘촘하게 세워두었을 것 같아요.
<오페라>를 간직할 수 있게끔 책으로 꾸리고 있어요. 다음 작품 준비도 하고요. 바쁘겠지만, 일단 이곳을 찾을 분들 반응이 가장 궁금해요. 빨리 오픈하면 좋겠네요.

에릭 오 Zoom-In 🔍 출간 계획 아트북으로 재해석되는 <오페라>. 평면에서도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는 방식을 구상 중. 올여름 슬슬 출간 소식을 알릴지도. 최근 플리 OHMA의 앨범 <Between All Things>를 반복 재생 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