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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깊이의 가벼움

 

책 <깊이에의 강요>에는 이런 대사가 나와요.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학부 시절, 비슷한 말을 들은 적 있는 김예지 작가(@mikijey4_4)는 재치 있게 응수합니다. ‘회화는 태생적으로 3차원이 아닌데, 깊이감을 부여할 필요가 과연 있냐’고 말이죠. 작가는 캔버스의 ‘납작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다양한 회화적 문법을 탐구해요. 트롱프뢰유(눈속임) 같은 2차원에 만들어지는 3차원적 착시에 흥미를 느끼면서요. 그녀가 회화를 대하는 태도를 알고 나면, 그림에 담긴 농담이 읽힐 거예요. 


 

 

‘Talk’

 

작가님의 최근 개인전 <Shape of Things>에 다녀왔어요. 폭설이 내린 다음 날이었죠. 갤러리 입구 계단을 오르자, 유리문을 통해 ‘TALK’라는 작품이 눈 쌓인 나뭇가지와 함께 시야에 걸렸어요. 바깥 풍경이 끼어든 그 장면 또한 하나의 그림 같았죠. 

전시장 주변에 풍경 요소가 많은 걸 저 역시 좋아해요. 실제로 그 매력 덕에 전시에 들러준 분들도 있고요. 감사하게도 갤러리 측에서 디스플레이에 세심히 신경 써주셨어요.  

 

비.프레임과는 첫 만남이네요. 독자들에게 소개를 부탁드려요. 

2024년 버전으로 말씀드리면 ‘차원’을 탐구하며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3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는 과정을 고민하는 페인터요. 

 

예중 예고를 나와 미대에 진학하고, 영국에서 파인 아트로 석사까지 마쳤죠. ‘페인터’의 길은 운명이었나요? 

다른 옵션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 같아요. 어릴 때 무용도 해보고 악기도 잡아봤는데, 매번 새로운 걸 그릴 수 있는 미술이 성향에 가장 잘 맞았던 게 아닌가 해요.  


- Conversation -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말이지만, ‘잘 그린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어요. 페인터들 사이에서 듣기 좋은 피드백은 아니죠. ‘손기술 있다’는 늬앙스가 담긴 말이니까요. 근데 전 그 ‘잘 그리는 것’을 놓고 싶지는 않아요.”

 

작가님을 알게 된 건 인스타그램을 통해서였어요. 특유의 앤틱한 색감, 캔버스가 오브제가 되기도 하는 작업 방식에 단숨에 매료됐죠. SNS를 통한 관심을 실감한 적이 있나요? 

영국에서 2019년에 한국에 돌아왔는데요. 전시를 하기 위해 여러 곳에 지원했지만, 뜻대로 잘 안됐어요. 그런데 인스타 DM을 통해 전시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사람들의 반응도 느껴지고요. 당시만 해도 상업 갤러리들과 함께 일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실제로 겪어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 내 그림을 좋아하고 찾아주는 사람들과 일하는 게 맞겠구나’. 

 

그림을 본 사람들이 어떤 감상을 전하는지 궁금해요. 

한국인이 그린 게 아닌 줄 알았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예쁘기만 한 그림이 아니라서 좋다는 콜렉터도 있었죠.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 어떠냐는 아이디어도 주시는데, 재미있어요. 관객이 작가에게 작품에 대한 의견을 직접적으로 주는 일이 흔하진 않으니까요.  

 

그림의 빈티지한 색감 때문에 오일 페인팅일 거로 생각했는데,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시더라고요. 

그런 얘기 자주 들어요. 왜 그런가 하고 생각해 봤더니, 아주 오래된 유화 작품 보면 색이 벗겨지고 날아간 듯한 느낌이 나잖아요. 제가 그 특유의 ‘쪼(고유한 습관)’를 흉내 내려는 게 있더라고요. 성대모사 하듯요. 나름의 유머랄까. 그렇다고 아크릴을 일부러 고집하는 건 아니에요.   

 

- Little Drawer -

 

작가님의 어떤 작품은 그림이면서 오브제로 기능해요. 캔버스 자체가 한 권의 책이 되기도, 여러 개가 모여 서랍장, 선물 상자, 정원이 되기도 하죠. 트롱프뢰유(눈속임)라고 하죠? 이런 작업 방식을 시도하게 된 이유와 그 매력이라면요?

눈속임을 통해 건네는 농담 같은 거예요. ‘트롱프뢰유’라고 하는 건 정확히 말하면 세필 같은 걸로 굉장히 정교하게, 실재에 가깝게 그리는 걸 말하는데요. 그에 비하면 제 붓질은 러프한 편이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회화는 태생적으로 3차원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위치에 어떻게 그림을 거느냐에 따라 맥락이 달라지는 점도 재밌고요. 

 

작가 인생 최초의 트롱프뢰유 그림은 뭐였어요? 

학부 졸업 후 주머니 사정상 지하에 작업실을 마련했어요. 그런데 언제가 밤이고 아침인지 구분이 안 가는 거예요. 둥근 캔버스에 달을 그리고, 네모난 캔버스에 창문을 그려 걸었죠. 하하. 작업실을 같이 쓰는 친구와 울며 웃으며 그러고 놀았어요. 

 

좌: ‘Toy Town’ 우: ‘Present’

 

대상을 관찰하는 본인만의 프로세스가 있나요?  

꿈에서 깨어나 한 발짝 떨어져 보듯 한달까요? 예를 들어 TV로 만화나 영화를 볼 때 갑자기 튕겨서 화면이 정지될 때 있죠? 그 순간 ‘아, 내가 TV를 보고 있었지!’, ‘움직이는 장면들이 한 장 한 장 다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거였지!’ 하면서 낯섦을 느끼잖아요. 그렇게 대상과 거리를 두고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고 해요. 


 

‘Hold(lace gloves)’, ‘Back(white sheer dress)’, Oval Chest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인물이 작가님과 관계된 것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인물을 그릴 때 여러 사진을 참고해 얼굴과 의상을 재조합 해요. 때론 옷을 다 검게 칠해서 사람을 하나의 물건 혹은 덩어리처럼 표현하기도 하죠. 오히려 사물은 증명사진이나 초상화처럼 접근하는 편이고요. 사물도 불쌍해 보일 때가 있지 않나요? ‘너 공장에서 조립되어 나왔구나' 하고. 


 

- Black hole Table -

 

그림에 때때로 등장하는 래빗 홀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까맣고 깊은 통로처럼 느껴졌어요. 

그림과 그림이 아닌 세계가 만나는 듯 한 지점을 의도했어요. ‘말’처럼 시각화 하기 어려운 요소를 그려 넣어 일반적인 정물화나 초상화와는 다르게 느껴지도록 했죠. 

래빗 홀을 그리게 된 계기 중 또 하나는 ‘깊이'에 관한 에피소드 때문이었어요. 학생 때 ‘그림은 참 잘 그리는 것 같은데 깊이가 없다’는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깊이가 없다는 게 과연 뭘까? 생각에 잠겼어요. 그림이란 게 태생적으로 평면이잖아요. 어떻게 깊이가 생길 수 있지? 그림에다 구멍을 그려 넣으면 깊이가 생기려나? 위트 있게 받아치려는 마음도 있던 것 같아요(웃음). 

 

- Looking glass House -

 

‘Looking glass House’는 대형 캔버스에 아이템을 하나하나 그린 건 줄만 알았는데, 아닌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자세히 보면 각각 다 소품이고, 캔버스예요. 커트러리는 점토로 빚고, 라벨이나 나뭇잎은 종이로 만든 다음 그 안에 철사를 넣어 구부려 모양을 냈죠. 그 위에 색을 칠하고요. 

 

조합에 따라 작품을 ‘같이 또 따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재밌어요. 콘텐츠도 레이아웃이나 사진 구성을 어떻게 하느냐에 매력이 달라지잖아요. 작가님에게 편집자 기질이 있다고 생각했죠. 

저에게 연출과 구성, 아트 디렉팅은 정말 중요해요. 영국에서 지낼 땐 그림을 흰 벽에 정직하게 걸어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설치와 회화를 섞기도 하고, 그림 옆에 이상한 장난감을 가져다 놓기도 했죠. 사람들이 그림 거는 재미를 좀 더 다채롭게 느꼈으면 좋겠어요. 실제 영국에서는 그림 옆에 자기 할머니 사진을 툭 걸고 그러거든요. 


 

'Water surface drawing’

 

 

이 그림은 어떤 상황에서 탄생했어요? 인스타그램 과거 피드에서 발견했어요. 상자에 물 그림을 넣은 거죠? 마치 수수께끼에 대한 답 같아서 유쾌했죠.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아오시오’. 

2015년쯤 유학 시절 만든 거예요. 일주일에 한 번 과제 크리틱 시간이 있었는데, 내가 얼만큼 뭘 그렸는지를 발표해야 했어요. 그런데 당시 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죠. 그림도 그리기 싫고,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서 건강식품 나무 박스 같은 걸 주워다가 교수한테 ‘일주일에 한 번씩 여기에 뭔가를 담아와 보겠다'고 했죠. 두꺼운 종이에 여러 버전의 물을 그렸어요. 숲에 흐르는 강물, 다리 옆의 강물 다 느낌이 다르거든요. 물에 반사된 세계, 주변 풍경도 담아낼 수 있었죠. 바꿔 끼기만 하면 다른 시공간을 내 앞에 불러올 수 있었어요. 

 


 

김예지식 위트가 이제 더 잘 이해 가네요. 차원의 맞물림과 어긋남 속에서 살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이런 ‘트위스트’ 코드를 좋아해요. 그림으로 던질 수 있는 유머와 재미라고 생각해요.

 

혹시 3D를 공부하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차원에 관심이 많으니까요. 

디지털 툴 다루는 데는 소질이 없는 것 같아요. 하하. 

 

2월에 개인전을 끝내고는 무얼 하며 지냈어요? 

큰일을 끝내면 연료를 넣어 충전해야 하는 타입이에요. 쉬면서 오사카에 다녀왔죠. 여행 가면 미술관과 그 나라에 있는 철물점은 꼭 가봐요. 경첩이나 자 등 그곳에서만 파는 도구를 만날 수 있거든요. 일본이나 유럽은 집을 직접 고쳐 쓰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대형 브랜드 철물점이 곳곳에 있어요. 이번엔 오사카에 있는 코-난 コーナン에서 초콜릿 색으로 되어 있는 이색적인 배수관 파이프를 발견했어요.

 

‘Parting’

 

작가님에게 ‘이미지 수집’은 참 중요하잖아요. 최근에는 휴대폰에 어떤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어요? 

머리카락을 땋고, 꼰 이미지들 그리고 화장하는 모습에서 얼굴 전체 말고 일부만 크롭한 사진도 많이 저장했어요. 그걸로 뭘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지금까지 11번의 개인전을 치렀어요. 10년쯤 페인터로 살았고요. 꾸준히 붓질하도록 추동하는 힘은 무엇인가요?

음, 예쁜 건 예쁘다고 말하고 싶은 것과 비슷해요. 내 보기에 예쁘고 웃기고 재밌는 걸 발견하면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거요.  

 

가까운 시일 내에 또 작가님을 만날 기회가 있을까요? 

5월에 있을 아트 부산(@artbusan)에 참가해요. 벌써 3월 말이네요. 한 달 동안 쉬면서 거의 그림을 안 그렸어요. 이제 진짜 그려야 돼요(웃음).

 

작가 인스타그램 @mikijey4_4 

 

에디터 최안나
사진 작가 제공, 비.프레임
Tag
김예지
회화
트롱프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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