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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가짜’의 가벼움
일부러 손품 들여 ‘가짜’를 만들어 내는 작가가 있습니다. 남다현(@dhnam_001)은 지금 우리 삶에 가까이 닿아 있는 현상이나 사물을 스티로폼, 박스, 종이, 천 등 한없이 가벼운 재료로 능숙하게 재현해요. 복제라는 방식을 통해 눈에 익은 것을 마치 새로운 창조물인 듯 재검토하게 만들죠. 이처럼 어떤 ‘가짜'는 작가의 의도와 관점이 담겨 새롭게 말을 건넵니다.
“제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가짜’라고 말하는 게 가장 정확해요.
가치가 올라갈 수 있는 가짜요.” -남다현-

지난 9월, 비주얼 아트 페스티벌 ‘웁서울 2023’에서 남다현 작가는 풍선 공장의 공장장으로 등장했습니다. 작업복과 모자, 위생 마스크까지 살뜰히 갖춘 모습이었죠. 그는 3색 풍선을 배배 꼬아 푸들 모양을 만드는 데 열심이었는데요. 완성된 풍선은 반짝이는 은박지 위에 양면테이프로 고정하고, 밑면엔 에디션 넘버를 새겨 넣었습니다. 이쯤에서 한 현대미술가의 작품이 생각나지 않나요? 제프 쿤스의 '풍선 개’가 떠올랐다면 보기 좋게 예상 적중입니다.

우: ‘Balloon Dog’
올 초 미술계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었죠. 미국의 아트페어 ‘아트 윈우드’의 프리뷰 행사에서 VIP 관객의 실수로 제프 쿤스의 5천만 원대 작품이 맥없이 산산조각 났어요. 깨진 조각마저 또 다른 예술 작품이라는 여론이 일었죠. ‘파편이라도 팔아 달라’는 반응도 나왔고요. 남다현 작가의 풍선 공장 퍼포먼스는 이에 대한 풍자였어요. 미술의 진정성과 그 가치의 순수함이, 영혼 없는 대량생산과 작품의 화폐화로 흔들리는 세태를 꼬집은 거죠.
'남다현표’ 풍선 개의 가격은 단돈 1천 원. 에디터는 즉석에서 네 마리를 데려와 바람이 빠져 쪼그라질 때까지 즐거이 감상했습니다. 박살 난 풍선 개 VS 바람 빠진 풍선 개. 그 사이 새어 나오는 유머.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남다현이 걸어온 복제의 길, 그 시작이 궁금해요.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보고 베끼는 걸 어려서부터 즐겨 했어요. 수업을 들으면서도 교과서 귀퉁이의 삽화를 똑같이 따라 그렸죠. 심심하면 책을 필사하고, 곤충이나 물고기, 만국기 등 맘에 드는 그림을 베끼곤 했어요.
모사가 몸에 밴 습관이었던 거네요. 작가 활동을 시작하기 전, 첫 복제작을 기억하나요?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지만, 실기 수업도 들었거든요. 그때 과제로 책을 한장 한장 필사한 걸 제출했어요. 낱장씩 놓고 보니 보기 썩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좋아하던 책을 복제하는 평면 작업을 선보였어요. 이후 설치, 퍼포먼스 같은 경험의 영역으로 개념을 넓혀 나갔고요.
2019년에는 이태원의 한 세탁소 건너편에 가짜 세탁소를 지어 주목받았어요.
이태원에 있는 룬트갤러리에서 첫 전시를 했는데, 그 앞에 ‘백합사'라는 오래된 세탁소가 있었어요. 주민들이 날마다 지나가다 마주쳤을 컴퓨터 바탕 화면 같은 존재였죠. 복제품과 마주하고 있으니 독특한 이질감이 풍겼어요. 우사단로가 젠트리피케이션 이슈가 있던 동네잖아요. 당연시 한 존재를 한번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지 않았나 싶어요.
🖼️ 작품 자세히 보기

우: 남다현 작가의 ‘#21’(복제품)

그 후로 4년 만에 지난 10월, 아트 페스티벌 <The Art Plaza : 을지미로 by IBK>에서 재공개했고요.
가짜에 진짜가 섞인, 각색 버전의 ‘다현세탁’을 선보였어요. 옷도 만들고, 디자인도 하는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키집(@ki.z.ip)과 덕화맨숀(@duckhwa_mansion)과 함께했죠.

이 ‘유일무이’한 가짜에 과몰입한 관람객은 없었나요?
한창 작품을 설치할 때 관리소 사람이 내려왔어요. 을지로 지하상가 근처의 세탁소 사장님들이 클레임을 걸었대요. 여기에 세탁소 차리면 안 된다고. 제 작품이 상권을 위협한 거죠. 옷 맡겨도 되냐고 물어본 사람도 10명이 넘어요. 하하. 언뜻 보면 진짜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속임수가 느껴지는, 그 간극에서 오는 유머가 중요한데, 제 의도와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하나하나 다 수작업이잖아요. 손품이 많이 들 텐데, 작업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세탁소를 예로 들면, 처음 선보일 당시 딱 4주 걸렸어요. 손이 느린 편은 아니기도 하고, 소위 견적이 나온다고 하죠. 하다 보니 테크닉이 생기면서 낭비하는 시간이 줄었어요.
얼마 전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미스치프 전시를 볼 때 작가님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보는 순간 멈칫하게 만드는 시각적 요소와 사회 풍자, 유머를 키워드로 대중의 공감을 끌어낸다는 점에서요.
시대성과 대중성, 유머는 제 작업에 참 중요해요. 비주얼적으로 ‘팝’하고 눈에 들어오는 것도 필요하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이 작업을 지속하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관람객이 작품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시각적 요소와 개념적 요소의 균형감을 잘 잡으려고 노력해요. 예술이라는 게 정의하기 참 애매하잖아요. 전 작품을 보고 그 이상의 생각을 하게 되면 작품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거든요. 마르셀 뒤샹의 ‘샘’을 보면서 변기 이상의 뭔가를 고찰하게 되듯이요.

남다현에게 ‘복제'는 왜 이토록 중요할까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이후의 필사본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초창기에는 제가 만드는 복제품이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느끼는 허무함을 녹여 넣을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최근에는 이 방식이 시대성에 부합하고, 유의미하다고 느끼고요. 인류 역사상 인간이 직면한 문제를 개선하고 해결해 줄 거라 믿었던 새로운 이론이나 발명품이 꼭 이롭지만은 않았잖아요. 우생학이라든지 원자폭탄이라든지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했죠. 새로운 걸 발견하고 개발하려는 의지도 좋지만, 우리가 이미 만든 걸 되돌아보면서 그것이 가지고 올 부작용에 대비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풀어가는 더 현명하지 않을까요? 제가 복제 작업을 계속 이어 가려는 이유예요.
작가님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단어를 하나 고른다면 뭐가 적절할 것 같아요?
‘가짜’가 가장 정확해요. 예술의 테두리 안에서는 아무리 가짜여도 가치는 변하지 않는 시장의 이해란 게 있잖아요.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향상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가짜인 거죠. 그렇지 않으면 이걸 왜 하고 있겠어요. 하하.

전시장에서 소액의 금전적 거래가 오가는 방식도 흥미로워요. 풍선 개는 1천원, 포켓몬 카드 팩은 5천원에 판매했죠. 환전소 프로젝트에서는 관람객이 1만원을 내면 직접 만든 가짜 만원권으로 환전해 주고요.
미술품이라는 게 값을 매겨 거래되는 시장의 성격을 지니고 있잖아요. 그 속성을 풍자하는 데 이 방법이 효과적일 것 같았어요. 관객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미술이 한자로 풀면 ‘아름다운 기술’이라는 거잖아요.
무겁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해요.”

우: ‘I’m a Severed Head in a Fridge Scene’
최근 ‘팩 패어 PACK FAIR’에서 공개한 작품은 개인전에서 보여준 작품과는 다른 느낌으로 신선했어요.
차가운 스테인리스 재질의 3단 선반에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이었어요. 항상 전시 콘셉트에 어울리는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데, 선반의 형태와 질감에서 영화 <더 보이스> 속 냉장고 장면이 떠오르더라고요. 라이언 레이놀즈가 사이코패스로 나오는 A와 B급 사이에 있는 영화인데요. 사람을 죽여서 머리를 잘라 냉장고에 넣어 놓고 그 머리와 대화를 해요. 거기서 모티프를 가져와 선반을 채웠어요. 가운데는 가수 투팍의 전기를 그린 <올 아이즈 온 미> 장면을 따왔고, 아래층은 <트로이>에서 아킬레스가 죽는 장면을 불러왔죠. 모두 죽음에 관한 영화예요. 요즘 불쾌함 속에 유쾌함이 묻어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어서 최근의 작업관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했던 작업이었어요.
핫한 동네의 젠트리피케이션, K 직장인의 경주마 같은 삶 등 국내 이슈에서 제프 쿤스의 풍선 개 파손 사건 등 글로벌 이슈로 점차 주제가 확장되고 있어요. 다음 전시의 주제를 귀띔해 준다면요?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세계가 지금 폭력의 사이클에 갇혔다고 보이거든요. 비단 전쟁뿐 아니라, 위계에 의해 벌어지는 온갖 일들, 비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행동을 인류 역사상 수없이 해왔잖아요. 지금도 하고 있고. 그 놀라운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최근 좋은 자극을 받은 아티스트나 콘텐츠가 있나요?
개그맨 황제성이요. 그가 팝 가수 샘 스미스의 의상, 제스처 등을 따라 한 걸 보고, ‘와! 저게 현대미술이지!’ 감탄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걸 다 했더라고요!
작가 아닌 개인으로서 복제해 보고 싶은 테마는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쭉 포켓몬 캐릭터를 좋아했어요. 지금은 캐릭터 종류가 무려 1천 종이 넘어요. 22종까지 만들었는데, 팬심 반 취미 반으로 포켓몬 카드를 꾸준히 모사해 보고 싶어요.
🎥포켓몬 카드 팩 영상 보기
진짜 세상에서의 남다현은 작품만큼 재밌는 사람인가요?
재미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술 한 잔 들어가면 더 유쾌해지기도 하고요. 애주가는 아니지만 사회적인 음주가로서 적당히 즐길 줄 아는 것 같아요. 취미는 딱히 없어요. 그냥 작품에 쓸 만한 재료를 다듬고 깎는다거나, 개냥이 9마리와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을 즐기죠. 집이 남양주인데, 창밖을 통해 서서히 변해가는 계절을 보며 행복감을 느끼고요.

개인전을 비롯해 여러 그룹전 그리고 다양한 페어까지, 누구보다 바쁜 한 해를 보냈어요. 내년에도 바쁘겠죠?
2020년 오!재미동 갤러리에서 선보였던 충무로역 복제 공간을 다시 보여드릴 기회가 생길 것 같아요. 무대미술 쪽으로 연극에도 참여할 예정이고요. 다양한 예술 분야의 사람들과 협업하면 미술인 특유의 조형적인 집착에서 멀어질 수 있고, 더 설레고, 배울 점이 많아요. 음, 거창한 목표는 없어요. 그저 ‘올해만큼만 하자’는 생각이에요.
🔖 남다현 작가 Info.
❗️12월 18일부터 홍대 네버마인드 아트라운지에서 이세준 작가와 2인전을 열어요!
‼️ 구글 포털을 흉내 낸 포트폴리오 웹 디자인도 남달라요. 꼭 한 번 들러보길!

